정인숙 권총 피살사건 신체구조 생식기 아들 육박전 유래 기생관광

정인숙 권총 피살사건 신체구조 생식기 아들 육박전 유래 기생관광

SBS 스페셜에서는 '정인숙 피살사건'에 대해 설명해 화제다.

SBS 스페셜에서 스토리텔러로 등장한 남보라는 정인숙의 사진을 공개하며 "영화배우 같은 미모. 일본어에 능통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회수여권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말했는데 회수 여권은 복수 여권으로 당시 일반인이 발급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사실상 해외 여행 자체가 어려웠던 시대로  "정인숙은 통금시간에도 자가용을 타면서 돌아다녔다"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 1970년 3월 17일 정인숙이 거리에서 권총에 맞아 숨졌다.

 


당시 정인숙의 집에서는 수첩이 발견됐는데 수첩 안에서는 그녀가 관계해 온 것으로 믿어지는 유력인사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비롯한 5대 재벌그룹 회장, 거물급 국회의원 등 26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에 정인숙 피살 사건 뒤에 권력층이 관계돼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같은 사실이 보도되자 육영수 여사는 참지 못하고 박정희에게 따져 물었고 박정희는 육영수에게 재떨이를 던졌다고 알려졌고 이 일로 인해 '육박전'이라는 풍자어가 탄생되기도 했다. 

 


정인숙은 정관계 인사들을 상대하는 고급요정에서 일하게 되었고 뛰어난 외모와 말빨로 선운각 에이스가 되었다.

정인숙이 상대했던 인물들이 대통령, 총리, 기업 총수 등 권력층, 재벌이다보니 돈벌이가 좋았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후 외국으로 쫓겨나 아이를 낳고 요정에서 짤렸다고 한다.

 


정인숙과 잠자리를 했던 최고위층들은 정인숙을 부담으로 여기게 되니 결국 정인숙은 한강 변에서 총에 맞아 죽고 말았다.

 


정인숙은 기교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인숙과 잠자리를 갖으면 바짝 마른다는 속설이 퍼지기도 했다. 심지어 정인숙의 신체는 특이하여 신체의 일부가 연구소로 보내어 영구보관되어 있다는 소문까지 퍼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일제시대 명월이라는 기생의 생식기를 사후에 적출하여 일본이 보관하다가 해방 이후 국과수로 이관되어 보관 중이라는 내용과 겹치는 것으로 보인다.

 


'SBS 스페셜' 방송에는 정인숙의 피살 뒤에는 정부의 '기생 관광'이 숨어있었다고 설명했고 이어 "정부는 정인숙 같은 기생에게 매춘은 애국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정인숙 권총 피살사건의 범인으로는 함께 총상을 입었던 오빠 정종욱 씨가 지목됐었다.

여동생의 운전기사 생활을 하던 그는 평소 불만이 있었다는 등의 이유로 자백을 하며 사건을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리고는 정인숙의 집에 거액의 현금 등을 시작으로 수상한 부분이 연이어 발견되면서 갖가지 의혹이 불거졌는데, 오빠 정종욱 씨가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으면서 사건은 그렇게 종결됐다.

 


19년 후 출소한 정종욱 씨는 당시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해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근황을 전한 바 있다.

정인숙이 각종 정계 인물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수첩을 지니고 다닌 이유로는 국무총리 정일권과의 관계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암살 배후로는 당시 국무총리 정일권이 유력인물로 떠올랐다. 정인숙의 아이가 바로 정일권의 아들이라는 의혹이 있던 탓이다.

1970년 사건 당시 3살이었던 정인숙의 아들 정모 씨는, 성인이 된 후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으나 정일권이 사망해 결국 아버지를 찾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외신을 통해 정인숙은 과거에 밀실정치가 많이 이뤄졌던 요정에 출입했던 기생으로 알려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과거 국가에서 관리했다는 ‘기생관광’이 조명을 받았다.

 

 

‘요정과’를 운영하며 “매춘은 애국이고 관광기생은 수출역군”이라는 황당한 개념으로 장려했던 사업 아닌 사업이 충격을 안겼다.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기생관광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충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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